사실은 또 누군가의 애정을 받는것이 무서웠다. 자신의 선택이 소중한 사람을 망가트렸다는 것이 무서웠다.
사람을 거부하기로 했다. 끝끝내 거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나를 보아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두렵다면 질려버리도록 넘치는 양을 내 쪽에서 주면 되는 일이다. 합리화에 가까운 어처구니 없는 발상 속에서도 상대가 계속되는 호의를 권리로 여기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길 원했다. 만약 그럼에도 반대로 주려는 사람이 있으면 도망가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뻔뻔함에 화를 내거나 금방 잊어주길 바랬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에서- 스스로가 후회하지 않도록 행동했다.
타인을 위한 삶이, 그 모든 언행이 사실은 상처를 감싸기 위한 만들어진 거짓덩어리었느냐 묻는다면 나는 확실하게 '아니오'라 대답할 것이다. 그것을 위선이라 칭하여도 상관없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눈 앞에서 미카엘을 대신해 팔 한 짝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그 바보같음에 환멸을 느끼며 타는듯한 고통속에서 고갤 숙인 채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스스로의 대가없는 헌신에 한편으로는 만족하면서도 그녀가 남긴 형체없는 굴레는 무의식의 대부분을 잠식해 있었고, 그에 맞추어 우연적으로 이어진 인연 사이에서 언제든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으리라.
-그럴 터였다.
'당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곳에 존재하는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해주었다.
'살아줘서 고맙다'
온갖 감정들이 섞여내린 짧은 한마디에 모든 것을 '보답'받은 기분이었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조여들었던 굴레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간의 고리를 이어주고 지켜내는 도구를 자처했던 '평화주의자'는 어느샌가 고리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세사람의 장소가 된 방 안에 우두커니 서서 가장 윗칸의 서랍장을 열어본다. 쭉 간직하고 있었던 사진 여러장과 차마 먹지도 못하고 포장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사탕봉지와, 곱게 접힌 하얀 쪽지가 함께 밀려나온다. 생각이 날때마다 한번씩 혼자 이런식으로 기억을 되새기는것이 일과가 되었다. 입버릇처럼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던 사람답지 않은 행동임은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시간에 바래지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녀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로는 존재를 쉽게 잊어주길 바란다며 자신을 희생하는것에 개의치 않았던 나 또한 결국 상대의 상처를 헤집어 억지로 스며들려 한 사람이었음을.
수신인이 적히지 않은 익숙한 필체를 읽어내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깨닫는 것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그에게도 조금은 다른 답을 할 수 있었을까.
너른 창에 걸린 얇은 커튼을 통과해 엷게 퍼진 햇살이 마룻바닥을 서서히 덮어나갔다. 오른손을 뻗어 가죽보호대를 찬 뭉툭한 왼쪽 어깨를 감싸쥔다. 완전히 아물었음에도 비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뇌의 착각에 의해 발생한다는 환상통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가장 큰 현실감을 끌어당겨주곤했다. 이것이야말로 변한 자신을 증명하는 아픔이기에. 또 나를 이곳에 있게 한 이유들이기에. 손끝에 힘을 주며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 나지막히 중얼인다.
"...잊지 않으께. 니도, 모두도. 내 죽을때까지 안고 살아가께. "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이 관계 또한 하나의 굴레라면 모두가 한 발짝 내딛은 이 자리에서, 다른 의미의 소중함과 자신의 미련함을 깨닫게 해준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이 원하는 한 평생 얽매여도 좋다고, 그리 생각하며 서랍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