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을 가두고 있는 창틀 밖으로부터 햇빛이 들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하얀 커튼이 방 안으로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높이가 낮은 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높은 집에서만 살았지. 남자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창가에 기대어 서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늘이 이렇게 높은 지 미처 몰랐군.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으니까. 하늘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공허했다. 부스스하게 뜬 머리 위를 바람이 쓰다듬으며 흩어졌다. 남자는 그 섬세한 감각을 느끼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그 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굳이 집 안으로 발을 들이는 사람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이곳으로 몸을 숨긴 이후부터 이 텅 빈 집을 찾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형, 뭐해요?"
목소리의 주인. 남자가 힐끗 덤덤한 시선을 소년에게로 돌렸다가, 다시 창밖을 주시했다.
"여기 좀 봐요."
그런 남자에게 소년이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꿈치를 창틀에 걸치고 비스듬히 선 남자는 소년의 말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등 뒤로 소년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남자가 가만히 그 발소리가 만들어내는 박자를 속으로 짚었다. 따뜻한 손이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제야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이 예쁜 모양으로 휘어졌다. 하얀 셔츠에 까만 스키니 타이. 어느덧 어른스러움을 자연스럽게 두를 정도로 자란 소년이 순간 남자에겐 낯설게 느껴졌다.
"내 말 들어줄래요? 드디어 할 수 있는 말이 있어요."
남자의 팔 언저리를 부드럽게 붙들어 끌며 소년이 말했다. 아무런 말없이 남자는 소년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햇빛만이 유일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크림색 벽지 위로 커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흐드러졌다. 텅 빈 방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는 소파 앞에서 소년의 걸음이 멎었다. 남자가 물끄러미 그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깐 여기 앉아 봐요."
별다른 거부 없이 새까만 가죽 소파 위에 대충 걸터앉은 남자의 앞에 소년이 무릎을 꿇었다. 왼쪽 무릎을 세워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에게 건조한 시선을 던지며 남자가 말했다.
"뭐 하냐, 너."
그렇게 남자의 시선보다 낮은 곳에서, 메마른 남자의 모든 것이 소년의 눈 안에 오롯이 담겼다.
“예쁘다.”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이리저리 뻗은 부스스한 머리. 창백하면서도 까슬한 피부. 반짝임이 사라진 눈과 부르튼 입술. 소년에겐 그런 남자의 어떤 것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좋아요. 햇빛을 받는 당신은 내 시선 안에서만 빛나고, 나는 그런 당신을 바라보면 마음이 설레. 나 이외에 세상의 어떤 누구도 당신을 바라보면서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없어요. 나만의 감정. 나만의 당신. 당신의 머리카락이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이라는 건 나만 알 수 있어요. 당신의 얼굴이, 그 눈의 색깔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인지는 나만 알면 좋겠어요. 깜빡이는 소년의 눈동자가 세상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감정을 노래했다. 들려요?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저 당신이면 돼요. 당신이면.
소년이 고개를 숙여 바닥에 얌전히 놓인 남자의 발을 두 손으로 소중한 듯 감싸 들었다. 밑단이 해진 청바지가 소년의 손등을 간지럽게 스쳤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흔들렸다. 부드러운 손길로 남자의 발목을 감싸 쥐고, 발바닥을 받쳐 든 소년의 시선이 낮아졌다. 소년의 살갗이 닿은 모든 부분에 불이 붙는 것만 같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도저히 알 수 없을 마음이라고. 남자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다 늘어지고 해진 옷가지, 말라빠져서 볼품없는 몸, 예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 어디의 무엇이 그렇게 사랑스러워서 소년은 자신을 이렇게도 갈구하는 것인지.
소년의 숨결이 간지럽게 남자의 발등을 스쳤다. 토도독 부서지는 날숨의 온기가 낯설어서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소년의 입술이 가볍게 남자의 발등을 두드렸다. 남자의 눈 밑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자리에 흔적이 남았다. 남자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화상의 흔적.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소년이 눈시울을 붉힌 남자를 보며 미소 지었다.